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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 타고 레트로 감성여행 '서천 판교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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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101회 작성일 20-06-0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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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뜨문뜨문 오가고, 시대극 드라마 같은 장면 펼쳐져
  레트로(복고풍) 여행의 성지를 찾았다. 판교마을은 시간이 멈춘 듯 작고 조용한 마을에 사람들은 뜨문뜨문 오가고 시대극 드라마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판교마을이 복고풍 여행지로 새롭게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한 방송사에서 소개되면서 레트로 여행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판교마을은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소로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차가 서는 판교역에서 “시간이 멈춘 마을” 판교 스탬프 지도를 들고 옛 감성을 찾아 마을을 천천히 돌아본다.
판교역에서 500m쯤 가면 오성 초등학교를 지나 첫 번째 스탬프를 찍을 고석주 선생 기념공원이다. 고석주 선생은 일제 강점기 때 하와이에 거주하면서 독립운동에 몸담은 언론이고 학교 선생이었다.
그 후 하와이에서 돌아와 군산에 거처하면서 3.5 만세 운동을 참여해 옥고를 치룬 뒤 판교마을에 정착해 농촌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 판교마을에서는 독립운동가 고석주 선생의 기념공원을 세웠다. 마을길로 접어들면 고석주 선생의 기념공원과 음식특화 거리가 눈에 띈다.
음식특화 거리라 해서 특별한 건 없다. 작은 시골마을에 몇몇의 음식점과 상점들이 마주하고 있을 뿐이다. 마침 배고픈 터라 접근성 좋은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보니 40년 전통의 삼성식당 냉면 전문점이 보인다.

다행히 휠체어를 사용하는 여행자도 접근할 수 있는 착한 식당이다. 이렇게 작은 마을에 접근 좋은 식당이 있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 여행객은 지역에 전통 먹을거리를 맛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접근할 수 있는 곳은 맛없어도 맛있는 곳이고, 접근할 수 없는 곳은 맛있어도 맛없는 곳으로 분류해 위안한다.
삼성식당에는 냉면과 만두가 메뉴에 전부이어서 물냉면과 비빔냉면을 시켰다. 그런데 냉면 양이 2인분은 족이 넘을 정도 많고 맛도 끝내준다. 엄청나게 맛있는 냉면을 숨 쉴새 없이 마구 먹었다. 게다가 입식 식탁과 좌식 식탁이 공존하는 곳이어서 더 맛있는 식당이다.
냉면 가격도 착하다. 2인분 양에 7000원이라니. 둘이 먹어도 넉넉한 양에 가격도 맘에 든다. 도시 같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양과 가격이라니. 배도 채웠으니 레트로 여행을 슬슬 시작해 볼까나……. 식당 뒤 옛 판교역부터 둘러봤다.

옛 판교역을 그대로 옮긴 세트는 정겨웠다. 판교역은 일제강점기 때 식량약탈과 징용, 징병, 위안부 수송을 위해 장항선을 개통하면서 운행됐다. 예부터 서산팔읍이라고 해서 서천, 비인, 한산, 홍산, 임천, 부여, 공주, 남포 등의 보부상들의 육로였던 서천은 염판교리 판교장의 이름을 따서 판교역이라고 했다.

해방 후 “판교역”은 도시로 향하는 길목이었고 한국정쟁의 아픔도 겪었던 역이다. 학생들의 통학열차와 희망과 꿈을 안고 외지로 떠나는 이들의 탈출구이었다. 판교역은 1931년 11월에 보통 역으로 영업을 시작했지만 장항선 직선화 공사로 2008년 지금의 판교역으로 이전했다.

옛 판교역은 “판교특화음식촌”으로 사용 중이다. 판교역은 옮겨졌지만 그 앞엔 파란 스레트 지붕의 “판교역전 슈퍼”는 그대로 있다. 한가로운 역전슈퍼는 나른한 오후 햇살에 졸고 있다. 역전 슈퍼를 카메라에 담아 저장하고 다음 스탬프 장소를 발길을 옮겼다.

워낙에 작은 마을이다 보니 몇 발짝만 가면 스탬프 장소를 금세 찾을 수 있다. 옛 정미소인 오 방앗간으로 가는 길목에 “서울 시계점”이란 간판이 남아 있는 집을 만났다. 도시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시계점을 복고풍 여행지 판교마을에서 만났다.

문명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지만 사람의 감성은 과거의 추억으로 회귀하려는 본성도 함께 진화 하나보다. 서천 판교마을이 추억을 자극하는 레트로 여행지로 관심을 끄는 것으로 충분히 검증된다. 예전엔 도심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시계점. 지금은 휴대폰이 있어 시계를 따로 차는 일이 별로 없다.

손목시계뿐 아니라 집안 곳곳에 추가 달린 부랄 시계나 뻐꾸기시계도 벽에 걸려 있었다. 추가 달린 시계는 매일 아침이면 밥을 줘야 하루 종일 숫자에 고정된 시간으로 일정하게 달려간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하게 달리다 보면 다음날 아침엔 다시 느려지기 시작한다. 그럴 땐 다시 시계에 밥을 줘야 하루라는 시간에 맞춰 똑딱 똑딱 제 할 일을 다한다.

시계점과 마주보고 있는 택배점도 오래된 건 마찬가지다. 문을 활짝 열어놓은 택배점은 시골가게에서만 느껴지는 풍경이 머물러 있다. 문을 열어놔도 그 안에 물건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이웃과 경계는 없는 곳이다. 경계가 없는 곳은 사람과의 경계도 느긋하게 아름답다는 의미도 포함된다.

농경사회에서는 내 것과 네 것의 경계는 그리 중요하지 않던 시대다. 품앗이로 이웃과 돕지 않으면 고된 농사일을 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웃집에 숟가락이 몇 갠지, 젓가락이 몇 갠지 까지 알 수 있는 이웃사촌인 거다.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친척보다 가까이에 사는 이웃사촌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농촌 문화. 이웃과 경계 없는 문화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곳이 서천판교마을이다.

시계점과 택배점을 조금 지나니 옛 정미소인 “오 방앗간”이다. 스탬프 보관함이 없었더라면 하마터면 방앗간을 놓치고 갈 뻔했다. 오 방앗간은 정미소로 활용되던 건물로 파란 양철지붕에 지붕 위쪽은 반 층 정도 더 올라가 있다.

벽은 얇은 나무를 세로로 덧대고 창살로 가려진 창문은 추억을 가둬 놨다. “오 방앗간”은 “오”씨 가의 주인이 운영했던 곳으로 “오혁철”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인근에서는 가장 오래된 방앗간으로 명절엔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줄서서 기다리곤 했다. “오 방앗간”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간이 그대로 머물러 있어 레트로 여행지로 사랑받기 시작한 곳이다.

방앗간을 지나면 일본식 가옥인 장미사진관이다. 장미사진관은 이층구조의 건물로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살던 집이다. 당시 판교면을 통치한 열한명의 일본 부자들은 조선인에게 쌀을 빌려줄 때 일본말을 시켰다고 한다. “텐노오하이 카반자이(천항패하 만세)”, “베에오 카시테쿠다사이(쌀좀 빌려주세요)”라고 하면서 일본인 지주에게 외치거나 일본말을 할 줄 알아야 쌀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동면”에서는 일본사람 스스로 “본토인”이라고 말하고 우리 민족은 “조선인”이라 하며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인은 남자 다섯 명, 여자 여섯 명, 총 열한명이 동면 사람들 5515명을 쥐락펴락하며 농토와 상권을 장악했다.

나라 잃은 설움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다시 생각해봐도 통곡할 일이다. 해방 이후엔 우시장과 세모시장이 열릴 때 상인들의 숙소로 사용하다가 한참 뒤 장미사진관으로 용도가 바뀌어 사용됐다. 지금은 건물만 그대로 남아 당시의 아픔을 전해주고 있다.

장미사진관과 함께 있는 판교시장은 너무 작아서 시장인지 아닌지 구분이 안 될 정도다. 마침 판교 오일장이라 그나마 사람들이 많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침 장은 파해서 한산했고 옷가게와 난전 몇 개가 오일장이 섯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선을 팔던 할머니는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 볼뿐 물건을 다 팔 마음도 없는 것처럼 좌판에 누어있는 생선만 넋 놓고 바라본다. 할머니 표정에서 도인의 무심함이 묻어난다. 시장 뒤쪽엔 아기 고양이 두 마리가 장난을 치며 놀고 있다. 어미는 보이지 않고 빈 참치만 고양이들 옆에 흩어져 있다. 골목이라고 할 것도 없이 몇 발짝만 가면 동일주조장이다.

동일주조장은 2000년도 까지 술을 만들던 공장이다. 판교마을에 사람이 많았던 시절 주막에 술을 공급하던 중요한 곳이다. 쌀이 귀했던 시절, 세수 확보 차원에서 가정에서 술을 담그면 밀주로 단속하면서 주조장을 통해 밀가루로 막걸리를 제조해 판매했다.

그 후 “통일벼”의 보급으로 쌀 자급자족이 원활해지자 “쌀 막걸리”가 보편화되기도 했다. 동일 주조장은 막걸리 재료인 쌀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쌀 방앗간과 같은 역할로 박 씨네가 3대째 운영했다. 동동주, 탁주, 농주, 왕대포는 그때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애환과 삶을 담고 있는 술로 허기를 채우는 곡주다.

동일주조장 창문은 쇠창살로 막아놨고 유리창은 군데군데 깨져 있다. 대문은 얼만 오래됐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았고 문 아래는 양철로 덧대었다. 주조장 안이 궁금했지만 굳게 잠긴 문은 출입을 막고 있다.

마을 중앙 대로를 지나 판교극장으로 발길을 이어갔다. 판교극장은 “공관”이라 불리며, 새마을 운동 당시 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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