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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외 장애인으로 살아가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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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882회 작성일 20-09-14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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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외 장애인으로 살아가기-①
 
한 청년의 정신질환과 주변에 관한 푸념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0-09-11 11:27:01

  나는 정신질환자이자, 법외 장애인이다. 심지어 광화문에서 장애등급제 폐지 서명을 하기도 했었다.
 ‘비장애인’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병원을 내원하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와 그래도 곧잘 자기 인생을 살고있는 것 같은 느낌도 있었으므로 당연히 병원을 찾아가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학교라는 공간은 온실과 다름없었고, 나의 문제는 곧바로 지적되기 시작한다. 몇가지 일이 계기가 되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은지 벌써 5년 차이다.
 5년동안 겪은 일들과 혹여 다른 청춘들도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몰라 모처럼 키보드를 잡았다.

내가 겪는 고통이 당연한줄 알았다.

아닐 걸 알면서도 죽을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남들도 ‘지옥’이라고 표현하는 등하교, 출퇴근 길이 그랬다.
전철에 앉아서 출발했는데, 네댓 개 역을 지나면 전철 안은 냉방을 해도 빈틈없이 사람으로 열기가 가득찬다.. 그럴 때면 가슴이 조여오는 듯한 통증과 비 맞은 듯 흐르는 땀이 나를 무서운 생각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내릴까’하는 고민도 몇 번 해보고, 몇 번은 내리기도 하고, 다시 타기도 하고. 무엇을 택하든 간에 남들처럼 움직이는 것, 그러니까, 되는대로 아무 교통수단이나 활용해서 어딘가 가는 일이 내게는 쉽지 않았다.
 이런 증상을 처음으로 심하게 겪은 건 2015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나는 날 때부터 자폐스펙트럼에 들 법한 강박적 성향을 보였다고 한다. 이모가 뻥튀기를 한입 베어먹자, 동그랗고 이쁘던 과자 모양이 이상해졌다며 울었다고 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온 생애를 돌아봤을 때, 그것도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라는 한 신호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대여섯 살 즈음엔, 유치원 급식 나르는 엘리베이터에 급식판을 올려놓다 숟가락을 떨어뜨린 뒤 너무 서럽게 운 탓에 부모님이 엄하게 키우는 줄 알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다른 건 흐릿하게 기억하거나 그마저도 지워졌는데도 그 작은 엘리베이터 틈에 숟가락을 잃어버린 순간은 정말 엄청난 충격이었다. 한 10년간 내 악몽으로 남았을 정도니까. 지금 생각해도 그걸 떨어뜨리지 말았어야 했다.

유년기에는 또래들과의 상호작용에 적응을 못 했지만(말 그대로, 초등학교 4-5학년에 이르기까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떠한 또래 아이들도 없었다), 학년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나아졌다.
고등학교 즈음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시골 학교에서는 ‘수능최저학력’을 맞출 수 있을 몇 안 되는 학생으로 꼽혔다.
 하지만, 노력이 부족한 탓에, 내신 성적이 좋지 못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는 못했지만(내가 가고싶은 대학을 가지 못할 것 같아서 부모님 앞에서 운 적도 있다),
 예닐곱 개 내는 게 한계인 대학입시제도 안에서 낼 수 있는 만큼 낸 원서 중 몇 개는 수능을 두 달 앞두고 좋은 소식을 보내주었다.

나는 여유를 만끽하며 수능 날까지, 그 다음날들까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며 지냈다. 하고싶은 공부도 하고, ‘야자’시간에 못보던 야구도 챙겨보고. 그렇게 지냈다.

이렇게 인생에 즐거운 일이 가득하던 한편, 내 장애 아닌 장애의 신호가 조금씩 다가왔다.
 고등학교 3학년, 수업에서 졸 이유가 하등 없는 수업에서 졸기 시작한 것이다. 매번 눈이 아팠고, 눈을 감는게 습관이 됐다.
안과를 갔더니 녹내장이니 평생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안구에 고이는 물이 제대로 나오지 못해서 생기는 병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눈이 멀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멍하니 있을 때면 눈을 감았다.
그 때만 하더라도 나는 ‘수능 보기 전 합격 통보를 받은 고3’이라는 편안한 신분이었으므로, 굳이 남들이 잠을 줄일 때 나도 같이 잠을 줄일 이유가 없었다.
하루에 16시간 쯤 자도 아무 문제 없었을 거다. 녹내장에 쓰이는 약물과 비슷한 작용을 하는 약이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약에 들어있어서 안약을 안 써도 되겠다는 말을 들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런 삶에서 내가 어떤 특정한 활동이나 상황에서 땀을 흘리고 숨이 조이고 가슴이 아파오는 일은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체력부족으로 취급했다.
심지어 체육시간에 자유시간을 주면, 땀으로 흠뻑 젖고마는 일이 싫어서 책을 읽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 교실 2층에 올라서면 항상 땀을 쏟아냈다. 날씨가 덥든, 춥든, 심지어 12월 말, 2월 중순의 추위 속에서도 말이다.

머리카락이 얼기도 했다. 그 때는 둔감해서 ‘땀을 닦으면 그만이지’ 생각했다. ‘내가 뚱뚱하고 운동이 부족해서 그렇겠지’로 넘어갔다
. 계단 오르기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다. 계단을 오르는 일이 힘에 부쳐서 땀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책가방을 꽤 무겁게 들고 다니긴 했지만, 책가방과 상관 없이 교실에 올라가는 길만 보면 땀이 비오듯 흐르기 시작한다. 나의 불안과 두려움이 계단을 땀범벅으로 만든 것을 알게 된 것은 3년도 되지 않았다.

그럼 왜 내가 정신장애가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살아왔을까? 어떻게보면 미련해 보이기 까지 하는데 말이다. 주변 사람들의 적당한 이해와 경계 때문이었다.
가족과 학교의 많은 사람들은 나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주었고, 나의 성격적인 특질과 고지식하다 못해 틀에 박혀 가끔 투정에 가까울 정도로 튀어나오던 강박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것에 어려워 하던 나의 모습들을 그럭저럭 참아주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병원가는 걸 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생각이 들때면 부모님이 반대했다. 누구나 결함 하나는 갖고 사는 거 아닌가 하고 살아왔고,
 ‘내가 ‘미친’ 것도 아닌데 정신과를 간다고?‘라는 가장 큰 압박이 있었다. 창세기에서 카인이 받은 낙인이 현대사회에서 제대로 찍히는 길 아닌가 했던 것이다. 그걸 이해했었고, 그래서 나는 스물 넷 즈음에야 병원을 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간간이 마음속에서 견디지 못한 것들은 종종 몸으로 나타났고, 아무 이유없이 몸이 아프기도 했고, 숨이 가빠지기도 했으며, 사람이 가득 들어찬 전철에서 목적지를 못가고 내린 일도 비일비재했다.
책을 사러 서점을 가도 마찬가지였다. 내게는 가장 즐거운 쇼핑이 되어야하는데, 서점을 들어가면 화장실부터 찾는다. 많은 사람들과 정신없는 공간에서 나는 땀을 먼저 흘리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익'으로 있으면서 그런 증상들은 더욱 심해졌고, 결국 나는 2017년 1월 하순에 정신건강의학과 외래를 가기 시작했다.
 3달 사이에 써본 약이 10종류는 족히 되었고, 오프라벨 처방까지해서 보험급여를 받을 수 없는 수준으로도 항우울제를 복용했다.

신경증적 정신장애를 앓고있는 이들은 알 것이다. 불안장애도 세로토닌, 우울장애도 세로토닌, 모든 것을 세레토닌을 늘려서 해결하려고 한다.
가끔 도파민에 작용하는 약을 먹기도 하지만, 우선 여겨지는 대상은 아니다. 비만환자인 나에게는 멀타자핀(상표 레메론 등) 같은 식욕항진이 부작용으로 따르는 약은 항상 금기였다.

나중에 다뤄야 할 문제지만, 식욕장애(신경성 식욕부진 및 거식증, 폭식증 등)는 식용항진을 유발하는 약물만 안 먹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어서 장기적으로 약을 복용하는 이들에게는
 약이 '테라포밍'한 것 같은 압도적인 몽롱함 속에서 배가 고파도 밥을 먹기 싫어지는 순간이 한두 번도 아니었고, 이것을 약으로도 해결하지 못하니 내가 식사 대용으로라도 과일, 주스,
 하다못해 탄산음료라도 조금씩 챙겨먹음으로써 에너지가 돌게 하는 것 외에는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나는 일생을 단순히 체력이 부족하고 잔병치레가 많은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지나왔다고 생각하고, 주변의 평가 역시 그래왔지만, 그 중에서 분명 정신의학적 증상들이 있었을 거라고 임상심리사와 의사들은 지적했다.

이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해온 것은 사회가 그리는 정신장애인의 모습은 저장강박으로 인해 청소를 못하는 치매 노인, 영화<웰컴 투 동막골>에서 나오는 머리에 새하얀 꽃을 끼워 멋을 부리는 순진한 사람,
기이하거나 비윤리적인 생각을 하는 편견 속 조현병 환자. 이런 정도의 사람이나 정신장애인으로 인정된다는 비공식적인 제도 때문이다.

정신장애 특히 조현정동장애나 조현병과 같이 치료가 어려우며,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평생 증상이 잔류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고서는
 그들의 어려움을 인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그런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을 위해 정부가 내 놓은 대안은 이른바 '정신건강증진법'이다.

정신건강증진법은 중증정신질환자들을 적은 예산으로 취급할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들의 자활과 탈시설은 안중에도 없으며,
 '치료비만 지원해주면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어려움이 해소되겠지'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서는 장애인복지법상 '정신장애'를 두고서 중증정신질환자를 관리하기 위한 별도의 법으로
 치료비 지원과 지역사회 인력을 사용하는 정도의 초보적이고 소극적인 복지제도를 만들고서, 강제입원이 문제가 될 때에는 강제입원을 이른바 '원포인트'로 개정하는 것이 지금까지 정부가 정신장애인에 대한 조치의 전부다.

그럼 21세기의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정부의 대안은 우리에게 무엇이 되었는가? 우선 법적인 장애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많은 변화를 느꼈을 것이다.
폐지됐다고 말할 수도 없는 장애등급제 이원화와 여타 정책들. 누군가는 적절하게 서비스를 받고 있을테지만, 장애인 복지예산은 항상 부족하다.

탈시설 탈수급을 정책의 중요 과제로 내놓고도 생계급여 간 예산조정을 이유로 자활사업 예산을 214억 원을 삭감했다.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겠다는 정부의 말은 '언제 한 번 밥 한끼 먹자, 내가 살게' 같은 하잘 것 없는 약속만도 못하게 됐다.
본질적으로 장애인들에 대한 복지는 장애정도를 고기 등급 매기듯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불편한지 사정하고, 그를 위해서 어떤 자원들이 필요한지 심사를 해야하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등급을 나누어서 돈을 차등 지급하는 것 보다 어디가 어떻게 무엇이 불편하며,
일상에 미치는 장애의 정도를 고려한 적절한 지원, 필요 서비스를 발굴·제공해 내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일에 미온적이다.

각종 행정부처에 민원에 진정에, 간청의 편지를 써도, 돌아오는 건 '다른 장애들과 형평성 문제를 따져야 하니 기다려라' 뿐인 것이다.
 피부과적 질환으로 장애가 생긴다면, 각 경우에 필요한 적절한 처치와 함께 장애의 상태가 최소한 고착, 궁극적으로는 완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정부 몫이다.
 장애인 복지 예산이 쉽게 타협의 카드로 쓰이고 매번 제대로된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자원도 확보를 못하는 것을, 법외장애인들에게 책임을 떠미는 것이다.

심지어 정신장애는 장애등급제를 폐지하려는 체 하는 과정 중에서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정신장애를 등록하는 기준은 여전회 4개 질환으로만 한정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매우 긴급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의 몫도 감당을 못하고 있었다.

내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정신장애를 판정받는 이들은 정신증이 있는, 노인환자가 대부분이다‘'라고 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히 그런 경우에는 장애인등록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당장에 정부가 개입하지 않으면 생사여부가 갈릴수도 있는 전생애를 투병한 이들만을 돕겠다고 선을 그은 것이었다.

나는 다른 중증의 우울장애 환자들처럼 대중교통도 타기 힘들어하고 자해도 하고 약 모아서 한번에 다 집어먹기도 하는 탓에 입원을 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행정심판 당시에 이를 제출했을 때, 행정심판 위원회는 재결서에서 ’우울장애‘병력이 인정되나, 사회직업적 기능에 장애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러한 괴리에 대해서는 차후에 다룰 것이다.

이러한 행정구제절차를 밟고도 국민연금공단 장애심사센터는 보건복지부장관령을 따라 심사했으니 문제가 없다고 하고,
보건복지부에서는 논의 중인 사항이라 공개할 수 없다고 하고, 장애인 등록을 해야 할 의무를 지닌 지자체는 규정대로 했을 뿐이라고 일축하는 상황 속에서 이의제기에 행정심판을 제기했지만,
 결과는 의사와 정부가 바라는 ’정신장애인‘의 상에 맞는 사람에게만 ’합격 목걸이‘를 걸어 주는 듯이 아니, 그것만큼도 공정하지 못한 행정이었다.

나의 분노는 다른 사람들도 겪는가 살펴보게 할 동기로 충분했다. 최근에 틱장애(투렛 증후군)에 대한 대법원 판례가 그랬다(원고는 1심 패소, 2심 승소하였지만,
2심 승소에 불복한 지자체장의 상고에 따라 법률심인 3심까지 가고야 말았다). 투렛 증후군의 질환 특성상, 제어할 수 없는 반복적 행동으로 인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현저히 어려운 경우임에도 불구하고,
 사법부가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을 명했는데도, 지자체는 사법부의 판단도 거부한 채로 정신장애인에 대한 적절한 서비스 지원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나 역시 앞서 언급한 사례와 같이 법률구조를 받아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이는 너무 힘든 싸움이 될 것임이 분명해지면서 포기하고 말았다. 승소한다고 지자체가 승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국민의 최소의 안전망이 되어야 할 국가가, '소송비용은 대주지만 지면 네가 내라'는 배짱이라니. 국가가 국민의 사회안정망 역할 하기를 두려워하고 인색하게 예산을 배정한다면,
 촛불로 일어섰음을 천명한 현 정부는 시민들을 기만하며 장애인들을 마치 선거 유세 때 쓰이고 버려지는 비닐 응원봉처럼 정치적 일회용품으로 쓰고 버린 것이다.

대통령의 캐치프레이즈는 ‘사람이 먼저다’였지만, 그 ‘사람’에 장애인을 포함해달라는 목소리는 ‘나중에’로 돌아왔으며, 장애등급제 폐지는
 6개 등급을 2개 등급으로 줄이는 우리가 강산이 바뀌도록 투쟁해왔던 장애등급제 폐지를 비롯한 장애인 관련으로 쌓여있는 거대한 정책과제들을 COVID-SARS-2 팬데믹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괄시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40만원 여도 되지 않는 장애인연금과 해괴한 체계의 생활지원 만을 받기 위해 모두가 싸워왔나? 아니다. 돈 안 줘도 되니까, 나를 비롯한 미등록장애인인 중증정신질환자를 위해서 손을 써야 하지 않을까?
이미 우리는 시간을 충분히 줬다. 오히려 너무 많이 줬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이젠 미룰 수가 없다. 예산 편성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최소한의 행정적 목적이라도 달성하고서 할 일이다. 애초에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한 예산은 그 자체로 낭비다.

*이 글은 정신질환 당사자가 보내온 기고문으로 '잘린 무지개'란 필명으로 게재 합니다.
 '잘린 무지개'의 의미는 무지개처럼 다양한 정신질환의 스펙트럼을 편의에 따라 재단하는 사회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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