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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이자 변호사인 박성민의 멋진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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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212회 작성일 20-12-09 11:23본문
의사이자 변호사인 박성민의 멋진 인생
과거는 과거, “내게 주어진 삶 의미 있게 만들어 가고 싶어”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0-12-07 11:59:30
박성민은 200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할 때 카이스트와 인하대 의대를 지원하였는데 카이스트 합격 소식이 먼저 왔다.
그동안 계속 공학도가 되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스트 진학을 계획하고 카이스트 입학 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꽃동네 봉사활동 OT를 갔다가 꽃동네 병원에서 어떤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사람은 죽지만 병이 들어 아프면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데 기여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때마침 인하대학교 의학과 합격 통지가 와서 갑자기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의사가 된 사연이 정말 드라마틱하다.
“대학 때 스키부였어요. 겨울이 되면 전국에서 스키부들이 모여서 합숙훈련을 하곤 했죠. 사고 나던 해도 2월 초에 제 생일이 있어서 저는 먼저 합숙훈련에서 빠져나와 귀가하게 돼 있었어요.
생일 전날 나가려고 하니 한 달 동안 합숙을 하며 정이 들었는지 아쉬운 마음에 친구 2명과 함께 제일 늦게까지 스키를 탔어요. 매우 추운 날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갈 때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어요.
마지막 날이니까 좀 과감하게 타 보려고 스키점프를 했다가 공중에서 균형을 잃으면서 허리가 먼저 바닥에 떨어졌죠.”
그때가 2005년 2월 본과에 들어가기 전, 그의 나이 21세였다.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혈기왕성한 시절이었다.
사고 후 강원도에 있는 원주 세브란스 병원에서 응급처치만 하고 앰뷸런스를 타고 모교인 인하대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척추수술을 받았어요. 척추에 척수라는 두꺼운 신경이 지나가는데 척추뼈가 부러지면서 절단면이 척수를 끊어 버린 거죠.
그러다 보니 끊어진 신경 밑으로 마비가 온 거예요. 어머님이 많이 우셨죠. 한 달 동안 집에도 안 가시고 계속 제 옆을 지키셨어요.”
그는 인하대학교 병원에서 퇴원한 후 서울 수유동에 있는 국립재활원으로 옮겼다. 장애인으 로서의 삶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만약 그날 마지막 리프트를 타지 않았더라면, 만약 스키부에 들지 않았더라면, 만약 의대에 오지 않았더라 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리며 하던 원망 대신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국립재활원에서 중도장애인들이 신체적 고통 외에도 법적으로 억울함을 당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법률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의대 2학년 때 다쳤으니 앞으로 4년이 남은 상태에서 ‘지체장애1급 장애인으로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죠.
의사보다는 변호사가 몸을 덜 쓰면서 하는 직업 이다 보니 법조계에 마음이 갔어요. 마침 법대를 다니거나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아 조언을 들으면서 확고하게 결심했죠.
의대 마지막 학년에 의대 국가고시와 로스쿨 입학시험을 같이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준비가 잘 됐던 것 같아요.”
그 결과 2010년도 의대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동시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입학했다. 법학 공부도 싫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라는 소리를 들었던 박성민은 그야말로 공부가 제일 쉬웠다.
“공부하며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으세요?”
“의사와 변호사 공부를 하면서 남들에 비해 많은 시간을 소비했죠. 하지만 지나온 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에 대한 투자이죠. 시시하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2013년 로스쿨 졸업과 함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의사면허가 있는 변호사라고 소문이 나면서 의료 관련 사건만 맡겨져서 하루 종일 진료기록만 보는 것이 일상이 돼 버렸다.
“진료기록부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긴 하지만,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 임상경험을 한 것과는 다르더라고요.
어차피 앞으로 진료기록부를 볼 팔자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임상경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변호사를 1년 하고 바로 다시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죠.”
그래서 박성민은 지난 2019년 2월 전문의(직업환경의학과) 자격을 취득한 후 3월부터 법무법인 평안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변호사 업무를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는 식의 인과관계를 많이 따지게 되죠.
직업환경의학과는 산업재해 관련 일이 대다수에요. ‘이 사람이 이런 병이 생긴 게 업무 때문이다.’는 판정도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가 하죠.
나중에 변호사 일과 함께하면 시너지를 내기에 직업환경의학과가 제일 좋겠다는 생각에 선택했어요. 지금도 수임 사건의 절반 정도는 의료 사건이랍니다.”
방황을 할 겨를도 없이 의사와 변호사의 길로 달려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자신의 성격을 꼽았다.
“제 성격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무덤덤하다’는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되돌릴 수 없다면 기왕에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보자는 주의죠. 먹고살려면 안정된 직업을 찾아야 하기도 했구요.”
사람들이 그에게 장애를 잘 극복했다고 칭찬을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극복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제가 장애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고가 난 지 15년이 다 돼 가지만 가끔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 ‘아, 내가 다쳤구나!’,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되죠.
계단에 막혀 이동하지 못할 때는 아직까지도 좀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요.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요. 다친 것은 다친 거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보자는 것이 제가 사는 법입니다.”
박성민은 남들은 하나도 하기 어려운 전문직 자격증을 2개나 갖고 있는 능력자인데 여기에 하나가 더 보태졌다. 바로 유튜브 크리에이터이다.
법무법인 평안의 동료 변호사 이경민, 손병구와 함께 법률 전문 유튜브 채널 ‘로이어 프렌즈’에서 법률 상식을 전달하고 구독자들의 상담을 받고 있다.
‘친구 같은 변호사들이 들려주는 쉽고 재미있는 법률 이야기’를 콘셉트로 △변호사 꽃무늬옷 입고 법정 가면 벌어지는 일
△변호사는 거짓말 탐지기를 속일 수 있을까 △변호사가 말하 는, 검사 권력 과연 어느 정도일까 △변호사가 실제 보이스피싱 전화를 들으면
△변호사가 사기당한다면 △변호사가 알려 주는 술집에서 시비 붙었을 때 대처 방법 △변호사의 암기법 등우리 일상과 가까운 법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구독자 수도 7만 명을 넘어섰고, 조회수는 900만 건 이상이다.
“저희 유튜브를 다른 변호사들이 많이 보시나 봐요. 사무실 주변에 변호사 사무실이 많은데 왔다 갔다 하면서 알아보시는 분들이 가끔 계시더라고요.”
앳된 소년 같은 외모이지만 박성민 변호사도 벌써 36세가 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앞으로의 행보에도 기대가 된다.
“사실 제가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어찌 보면 많은 것을 누렸다고 볼 수 있죠.
과거 제게 일어났던 사고를 되돌릴 수 없듯이, 앞으로의 삶도 언젠가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올 거예요. 과거에 묶여 있는 삶이 아닌, 내게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가고 싶어요.”
‘인생은 기니 조급해하지 마라!’와 ‘인생은 길지 않으니 당당히 살아라!’ 두 극명한 말을 합쳐서 실패를 해도 시시하지 않게, 실패를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며 살겠다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과거는 과거, “내게 주어진 삶 의미 있게 만들어 가고 싶어”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0-12-07 11:59:30
박성민은 2003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진학할 때 카이스트와 인하대 의대를 지원하였는데 카이스트 합격 소식이 먼저 왔다.
그동안 계속 공학도가 되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스트 진학을 계획하고 카이스트 입학 전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꽃동네 봉사활동 OT를 갔다가 꽃동네 병원에서 어떤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게 되었다.
사람은 죽지만 병이 들어 아프면 일찍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데 기여하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때마침 인하대학교 의학과 합격 통지가 와서 갑자기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의사가 된 사연이 정말 드라마틱하다.
“대학 때 스키부였어요. 겨울이 되면 전국에서 스키부들이 모여서 합숙훈련을 하곤 했죠. 사고 나던 해도 2월 초에 제 생일이 있어서 저는 먼저 합숙훈련에서 빠져나와 귀가하게 돼 있었어요.
생일 전날 나가려고 하니 한 달 동안 합숙을 하며 정이 들었는지 아쉬운 마음에 친구 2명과 함께 제일 늦게까지 스키를 탔어요. 매우 추운 날이었는데 마지막으로 제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갈 때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어요.
마지막 날이니까 좀 과감하게 타 보려고 스키점프를 했다가 공중에서 균형을 잃으면서 허리가 먼저 바닥에 떨어졌죠.”
그때가 2005년 2월 본과에 들어가기 전, 그의 나이 21세였다.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던 혈기왕성한 시절이었다.
사고 후 강원도에 있는 원주 세브란스 병원에서 응급처치만 하고 앰뷸런스를 타고 모교인 인하대 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척추수술을 받았어요. 척추에 척수라는 두꺼운 신경이 지나가는데 척추뼈가 부러지면서 절단면이 척수를 끊어 버린 거죠.
그러다 보니 끊어진 신경 밑으로 마비가 온 거예요. 어머님이 많이 우셨죠. 한 달 동안 집에도 안 가시고 계속 제 옆을 지키셨어요.”
그는 인하대학교 병원에서 퇴원한 후 서울 수유동에 있는 국립재활원으로 옮겼다. 장애인으 로서의 삶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만약 그날 마지막 리프트를 타지 않았더라면, 만약 스키부에 들지 않았더라면, 만약 의대에 오지 않았더라 면…
사고를 피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리며 하던 원망 대신 ‘앞으로 무엇을 해서 먹고살아야 할까’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국립재활원에서 중도장애인들이 신체적 고통 외에도 법적으로 억울함을 당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법률적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의대 2학년 때 다쳤으니 앞으로 4년이 남은 상태에서 ‘지체장애1급 장애인으로서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죠.
의사보다는 변호사가 몸을 덜 쓰면서 하는 직업 이다 보니 법조계에 마음이 갔어요. 마침 법대를 다니거나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아 조언을 들으면서 확고하게 결심했죠.
의대 마지막 학년에 의대 국가고시와 로스쿨 입학시험을 같이 준비했는데 생각보다 준비가 잘 됐던 것 같아요.”
그 결과 2010년도 의대를 차석으로 졸업하고 동시에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 입학했다. 법학 공부도 싫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수재’ 라는 소리를 들었던 박성민은 그야말로 공부가 제일 쉬웠다.
“공부하며 보낸 시간이 아깝지 않으세요?”
“의사와 변호사 공부를 하면서 남들에 비해 많은 시간을 소비했죠. 하지만 지나온 긴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에 대한 투자이죠. 시시하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2013년 로스쿨 졸업과 함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의사면허가 있는 변호사라고 소문이 나면서 의료 관련 사건만 맡겨져서 하루 종일 진료기록만 보는 것이 일상이 돼 버렸다.
“진료기록부를 보면 무슨 말인지 알긴 하지만, 머리로만 아는 것과 실제 임상경험을 한 것과는 다르더라고요.
어차피 앞으로 진료기록부를 볼 팔자라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임상경험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변호사를 1년 하고 바로 다시 병원에서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밟았죠.”
그래서 박성민은 지난 2019년 2월 전문의(직업환경의학과) 자격을 취득한 후 3월부터 법무법인 평안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변호사 업무를 하다 보면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이런 결과가 발생했다.’는 식의 인과관계를 많이 따지게 되죠.
직업환경의학과는 산업재해 관련 일이 대다수에요. ‘이 사람이 이런 병이 생긴 게 업무 때문이다.’는 판정도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가 하죠.
나중에 변호사 일과 함께하면 시너지를 내기에 직업환경의학과가 제일 좋겠다는 생각에 선택했어요. 지금도 수임 사건의 절반 정도는 의료 사건이랍니다.”
방황을 할 겨를도 없이 의사와 변호사의 길로 달려올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그는 자신의 성격을 꼽았다.
“제 성격이 긍정적이기보다는 ‘무덤덤하다’는 쪽에 가까운 것 같아요. 되돌릴 수 없다면 기왕에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해보자는 주의죠. 먹고살려면 안정된 직업을 찾아야 하기도 했구요.”
사람들이 그에게 장애를 잘 극복했다고 칭찬을 하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극복이란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저는 제가 장애를 극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고가 난 지 15년이 다 돼 가지만 가끔 쇼윈도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면 ‘아, 내가 다쳤구나!’, ‘내가 휠체어를 타고 있구나!’라고 새삼 깨닫게 되죠.
계단에 막혀 이동하지 못할 때는 아직까지도 좀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요.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아요. 다친 것은 다친 거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해보자는 것이 제가 사는 법입니다.”
박성민은 남들은 하나도 하기 어려운 전문직 자격증을 2개나 갖고 있는 능력자인데 여기에 하나가 더 보태졌다. 바로 유튜브 크리에이터이다.
법무법인 평안의 동료 변호사 이경민, 손병구와 함께 법률 전문 유튜브 채널 ‘로이어 프렌즈’에서 법률 상식을 전달하고 구독자들의 상담을 받고 있다.
‘친구 같은 변호사들이 들려주는 쉽고 재미있는 법률 이야기’를 콘셉트로 △변호사 꽃무늬옷 입고 법정 가면 벌어지는 일
△변호사는 거짓말 탐지기를 속일 수 있을까 △변호사가 말하 는, 검사 권력 과연 어느 정도일까 △변호사가 실제 보이스피싱 전화를 들으면
△변호사가 사기당한다면 △변호사가 알려 주는 술집에서 시비 붙었을 때 대처 방법 △변호사의 암기법 등우리 일상과 가까운 법률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구독자 수도 7만 명을 넘어섰고, 조회수는 900만 건 이상이다.
“저희 유튜브를 다른 변호사들이 많이 보시나 봐요. 사무실 주변에 변호사 사무실이 많은데 왔다 갔다 하면서 알아보시는 분들이 가끔 계시더라고요.”
앳된 소년 같은 외모이지만 박성민 변호사도 벌써 36세가 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앞으로의 행보에도 기대가 된다.
“사실 제가 과감하게 도전하면서 살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온, 어찌 보면 많은 것을 누렸다고 볼 수 있죠.
과거 제게 일어났던 사고를 되돌릴 수 없듯이, 앞으로의 삶도 언젠가는 되돌릴 수 없는 순간이 올 거예요. 과거에 묶여 있는 삶이 아닌, 내게 주어진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가고 싶어요.”
‘인생은 기니 조급해하지 마라!’와 ‘인생은 길지 않으니 당당히 살아라!’ 두 극명한 말을 합쳐서 실패를 해도 시시하지 않게, 실패를 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며 살겠다는 것이 그의 좌우명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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