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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 공익광고 통해 본 우리 사회의 민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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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329회 작성일 22-02-07 09:57본문
시혜와 동정에 기반한 저인지·중증장애 중심 정책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2-02-04 14:04:28
과거부터 장애인은 시혜와 동정의 존재로 묘사되며 불쌍하고 능력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장애인이 노동력 떨어진다고 해서 군주가 포악한 경우 학살당하는가 하면, 유태인 학살 참극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에서도 장애인은 학살 대상 1순위였을 정도로 비극의 역사가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 경우도 이와는 형태가 다를지 몰라도, 과거 공영방송에서 사랑의 리퀘스트란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장애인은 자신이 불쌍해 보여야 함을 장애와 가난을 통해 증명해 돈을 구걸하다시피 하는 굴욕적인 시절이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 등을 본 대중들은 역시 장애인은 불쌍하고 능력 없는 존재란 편견을 가지기 쉬웠다.
이런 과거에 비하면 최근엔 사랑의 가족이란 프로그램 등에서 장애인을 둘러싼 구조적 사회문제를 파헤치는가 하면,
각종 기관에 장애인식 교육이 의무화되고, 직장에선 장애인, 비장애인의 사회통합 위한 직장 내 장애인식개선교육 추진 등 장애인식이 어느 정도 증진된 듯하다.
능력엔 장애 없다는 고용노동부 장애 관련 광고도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직도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존재, 능력 없는 존재로 보는 편견은 여전한 것 같고, 특히 지적장애인, 자폐성 장애인에겐 더욱 그런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신경다양인 및 자폐성 장애인 동료들과 발달장애 공익광고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할까 한다.
‘전 주인공은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제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자주 오셨으면 좋겠다며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한 발달장애인이 화면에 출연하는 것으로 광고는 시작된다.
이후에는 기분 좋다며 호응해주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더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한 발달장애인을 광고에서 보여준다. 이 발달장애인은 길가에서 사람들과 함께 밴드 활동하며 악기를 연주한다.
연주 후 다음 장면에선 열린 화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발달장애인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세 발달장애인이 한 목소리로 ‘우리는 발달장애인입니다’하며 ‘우린 특별한 주인공보다 당신의 평범한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공익광고를 마무리한다.
이 광고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난 주인공은 싫습니다’란 말을 들으며 약간은 중의적인 느낌이 들었다. 장애를 극복한 정신승리를 했다며,
그 장애인을 칭송하는 것 같으나 장애를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 장애인을 감동 포르노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등의 장애인식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있다.
그래서 ‘난 주인공은 싫다’는 의미가 감동 포르노 주인공이 되기 싫다는 의미라면, 조금은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러다가도 권리 주체가 아닌 객체로 여김을 당하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발달장애인의 현실 생각하면 ‘주인공이 싫다’는 말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싫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현재의 발달장애인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그래서 중의적인 느낌이 든다는 거다.
또한, ‘특별한 주인공보다 당신의 평범한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도 중의적인 의미로 들린다.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특별하게 취급받을 필요도 없고 그냥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어울리는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한편으로는 비장애 중심의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그냥 그럴듯하게 순응하는 것보단,
멋있고 당당하게 인생 주인공으로 살아가게끔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꿈을 마음껏 펼치고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중의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공익광고에서의 발달장애인들 직업은 바리스타, 화가, 밴드활동 악기 연주자고, 이 직업들은 대개 단순노무직이나 저임금 직종에 해당한다.
여기에 발음이 약간 어눌한 것도 있는 등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잘 모르는 이가 이 광고 보면 ‘역시 발달장애인은 능력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편견 갖기 쉽다. 내가 봤을 땐 다들 능력 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직업들은 대개 저인지, 중증장애 중심의 직업이기도 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점점 기계로 대체될 수 있기도 하다.
요즘엔 인공지능 화가도 등장하며, 인공지능이 연주가와 작곡 등의 영역까지 침투하는 시대니까. 그렇게 되면 지적·자폐성 장애인은 직업으로 살아갈 길이 점점 막막해질 수도 있다.
더군다나 자폐성 장애의 경우엔 인지능력이 낮은 저인지 장애인뿐만 아니라 인지능력 높은 고인지 장애인도 있다.
자폐성 장애를 정체성으로 하나, 기존에 알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주위환경에 따라 사회성 높은 장애인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런데 고인지 특성에 변호사, IT업계 등의 괜찮은 질의 일자리에 종사하거나, 당당하게 인생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모습은 이 광고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결국, 지적·자폐성 장애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저인지, 중증장애 중심으로만 부분적으로 이해해 광고를 보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지적·자폐성 장애와 관련해 정부 정책은 저인지, 중증장애 중심의 돌봄 정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이마저도 서비스가 충분하지 못하다.
고인지 장애인은 장애인연금을 받지 못하고 고용 시에도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장애를 이유로 특히 대기업에선 아예 대부분 채용에서 탈락시키기까지 한다.
사실 고인지 지적·자폐성 장애인 정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광고를 보여주는 주체는 공익광고협의회라는 공익광고 전담기구로 이 기구의 운영 및 지원은 공공기관인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한다.
이 공공기관도 사실은 지적·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인식증진을 위해 광고를 만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는 달리 광고를 통해 공공기관에서는 저인지, 중증장애가 있는 지적·자폐성 장애인만을 생각했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정부도 공공기관과 마찬가지로 정책 시 저인지, 중증장애가 있는 지적·자폐성 장애인만 고려하는 형국이다.
광고를 통해 지적·자폐성 장애인에 대해 잘못 알리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차별행위라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조 1항 4호의 금지행위에도 해당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 광고는 지적·자폐성 장애에 대한 이해와 다양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적·자폐성 장애인을 능력 없는 사람으로 여기며 불쌍하고 무조건 도와줘야 한단 편견은 더욱 강화될까 우려된다.
이런 편견이 있는 분위기라면, 당당히 세금 내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을 찾아보기란 어렵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저인지뿐만 아니라 고인지 지적·자폐성 장애인까지 권리 주체로 바라보며 정책 시 고려하고,
우리 사회 인식이 바뀌어 합리적 조정(정당한 편의)을 권리로 여기며 이들에게 적절하게 제공한다면 어떨까?
고인지든 저인지든 상관없이 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자조모임 지원 정책을 제대로 마련하고,
장애인연금, 심리상담 등의 복지서비스를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면 어떨까?
직업에서 능력을 잘 발휘하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교수, IT, 법조인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발달장애인들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그럴 때 발달장애 공익광고도 저인지만이 아닌 고인지 장애인도 나오고 당당하게 사회에서 활동하는 장애인도 보여주는 등 다양성 있고, 권리 주체로서의 장애인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거라 본다.
발달장애인이 능력 없고 불쌍한 존재라는 시혜·동정에 기반한 편견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소중한 사회구성원으로 존중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발달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이 권리 주체라는 패러다임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공익광고를 통해 지적·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은 강화되며 영원한 어린아이로 낙인 받으며 희망 한 줄기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2-02-04 14:04:28
과거부터 장애인은 시혜와 동정의 존재로 묘사되며 불쌍하고 능력 없는 존재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장애인이 노동력 떨어진다고 해서 군주가 포악한 경우 학살당하는가 하면, 유태인 학살 참극의 현장인 아우슈비츠에서도 장애인은 학살 대상 1순위였을 정도로 비극의 역사가 있기도 했다.
우리나라 경우도 이와는 형태가 다를지 몰라도, 과거 공영방송에서 사랑의 리퀘스트란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장애인은 자신이 불쌍해 보여야 함을 장애와 가난을 통해 증명해 돈을 구걸하다시피 하는 굴욕적인 시절이 있었다.
이런 프로그램 등을 본 대중들은 역시 장애인은 불쌍하고 능력 없는 존재란 편견을 가지기 쉬웠다.
이런 과거에 비하면 최근엔 사랑의 가족이란 프로그램 등에서 장애인을 둘러싼 구조적 사회문제를 파헤치는가 하면,
각종 기관에 장애인식 교육이 의무화되고, 직장에선 장애인, 비장애인의 사회통합 위한 직장 내 장애인식개선교육 추진 등 장애인식이 어느 정도 증진된 듯하다.
능력엔 장애 없다는 고용노동부 장애 관련 광고도 본 기억이 난다.
하지만 아직도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존재, 능력 없는 존재로 보는 편견은 여전한 것 같고, 특히 지적장애인, 자폐성 장애인에겐 더욱 그런 것 같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신경다양인 및 자폐성 장애인 동료들과 발달장애 공익광고 관련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오늘은 그 얘기를 할까 한다.
‘전 주인공은 싫습니다’라고 말하며, 제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자주 오셨으면 좋겠다며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한 발달장애인이 화면에 출연하는 것으로 광고는 시작된다.
이후에는 기분 좋다며 호응해주면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더 하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한 발달장애인을 광고에서 보여준다. 이 발달장애인은 길가에서 사람들과 함께 밴드 활동하며 악기를 연주한다.
연주 후 다음 장면에선 열린 화실에서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발달장애인도 보여준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세 발달장애인이 한 목소리로 ‘우리는 발달장애인입니다’하며 ‘우린 특별한 주인공보다 당신의 평범한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말로 공익광고를 마무리한다.
이 광고를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먼저 ‘난 주인공은 싫습니다’란 말을 들으며 약간은 중의적인 느낌이 들었다. 장애를 극복한 정신승리를 했다며,
그 장애인을 칭송하는 것 같으나 장애를 사회적 문제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축소해 장애인을 감동 포르노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등의 장애인식이 아직도 우리나라에 있다.
그래서 ‘난 주인공은 싫다’는 의미가 감동 포르노 주인공이 되기 싫다는 의미라면, 조금은 좋은 쪽으로 받아들여도 될 듯하다.
그러다가도 권리 주체가 아닌 객체로 여김을 당하며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나라 발달장애인의 현실 생각하면 ‘주인공이 싫다’는 말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기 싫다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현재의 발달장애인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겠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그래서 중의적인 느낌이 든다는 거다.
또한, ‘특별한 주인공보다 당신의 평범한 이웃이 되고 싶습니다’도 중의적인 의미로 들린다.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특별하게 취급받을 필요도 없고 그냥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어울리는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건 좋다.
하지만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한편으로는 비장애 중심의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도록 그냥 그럴듯하게 순응하는 것보단,
멋있고 당당하게 인생 주인공으로 살아가게끔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꿈을 마음껏 펼치고 이를 현실화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그래서 중의적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공익광고에서의 발달장애인들 직업은 바리스타, 화가, 밴드활동 악기 연주자고, 이 직업들은 대개 단순노무직이나 저임금 직종에 해당한다.
여기에 발음이 약간 어눌한 것도 있는 등 우리 사회에서 장애를 잘 모르는 이가 이 광고 보면 ‘역시 발달장애인은 능력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편견 갖기 쉽다. 내가 봤을 땐 다들 능력 있지만 말이다.
또한, 이 직업들은 대개 저인지, 중증장애 중심의 직업이기도 하면서, 4차 산업혁명 시대엔 점점 기계로 대체될 수 있기도 하다.
요즘엔 인공지능 화가도 등장하며, 인공지능이 연주가와 작곡 등의 영역까지 침투하는 시대니까. 그렇게 되면 지적·자폐성 장애인은 직업으로 살아갈 길이 점점 막막해질 수도 있다.
더군다나 자폐성 장애의 경우엔 인지능력이 낮은 저인지 장애인뿐만 아니라 인지능력 높은 고인지 장애인도 있다.
자폐성 장애를 정체성으로 하나, 기존에 알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주위환경에 따라 사회성 높은 장애인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그런데 고인지 특성에 변호사, IT업계 등의 괜찮은 질의 일자리에 종사하거나, 당당하게 인생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의 모습은 이 광고에서는 보기가 힘들다.
결국, 지적·자폐성 장애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저인지, 중증장애 중심으로만 부분적으로 이해해 광고를 보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지적·자폐성 장애와 관련해 정부 정책은 저인지, 중증장애 중심의 돌봄 정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이마저도 서비스가 충분하지 못하다.
고인지 장애인은 장애인연금을 받지 못하고 고용 시에도 말을 대놓고 하지는 않지만, 장애를 이유로 특히 대기업에선 아예 대부분 채용에서 탈락시키기까지 한다.
사실 고인지 지적·자폐성 장애인 정책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 광고를 보여주는 주체는 공익광고협의회라는 공익광고 전담기구로 이 기구의 운영 및 지원은 공공기관인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에서 한다.
이 공공기관도 사실은 지적·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인식증진을 위해 광고를 만들었을 터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는 달리 광고를 통해 공공기관에서는 저인지, 중증장애가 있는 지적·자폐성 장애인만을 생각했다는 느낌이 자꾸 든다.
정부도 공공기관과 마찬가지로 정책 시 저인지, 중증장애가 있는 지적·자폐성 장애인만 고려하는 형국이다.
광고를 통해 지적·자폐성 장애인에 대해 잘못 알리는 거나 다를 바 없는 차별행위라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조 1항 4호의 금지행위에도 해당한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이 광고는 지적·자폐성 장애에 대한 이해와 다양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지적·자폐성 장애인을 능력 없는 사람으로 여기며 불쌍하고 무조건 도와줘야 한단 편견은 더욱 강화될까 우려된다.
이런 편견이 있는 분위기라면, 당당히 세금 내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을 찾아보기란 어렵다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터이다.
저인지뿐만 아니라 고인지 지적·자폐성 장애인까지 권리 주체로 바라보며 정책 시 고려하고,
우리 사회 인식이 바뀌어 합리적 조정(정당한 편의)을 권리로 여기며 이들에게 적절하게 제공한다면 어떨까?
고인지든 저인지든 상관없이 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자조모임 지원 정책을 제대로 마련하고,
장애인연금, 심리상담 등의 복지서비스를 충분히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면 어떨까?
직업에서 능력을 잘 발휘하는 지적·자폐성 장애인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교수, IT, 법조인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는 발달장애인들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그럴 때 발달장애 공익광고도 저인지만이 아닌 고인지 장애인도 나오고 당당하게 사회에서 활동하는 장애인도 보여주는 등 다양성 있고, 권리 주체로서의 장애인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거라 본다.
발달장애인이 능력 없고 불쌍한 존재라는 시혜·동정에 기반한 편견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소중한 사회구성원으로 존중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발달장애인을 포함한 장애인이 권리 주체라는 패러다임으로 변화하지 않는 한
공익광고를 통해 지적·자폐성 장애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은 강화되며 영원한 어린아이로 낙인 받으며 희망 한 줄기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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